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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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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민간에 비장되어 온,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 이 다섯 종의 책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환단고기桓檀古記』다.
신라 고승高僧 안함로(安含老,579~640)에서 조선조 이맥(李陌,1455~1528)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 년 세월에 걸쳐 다섯 사람이 저술한 사서가 하나의 책으로 묶여진 것이다. 이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글들을 편집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삼성기(三聖紀)라는 책은 세조실록에도 그 책 이름이 나온다. 민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신라, 백제 전후부터 내려오던 고귀한 우리의 역사 기록을 거반 망라해서 묶어 놓은 책이다. 신라 때부터 마지막 왕조 근세조선 때까지 당대의 최고 지성인 다섯 분이 천년에 걸쳐서 기록한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이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아성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환단고기>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를 전해준 분들이 대부분 절식(絶食)으로, 또 일본 제국주의 침략주의자들에게 잡혀서 사지가 잘리고 그렇게 무참하게 죽었다. 이『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병도선생 이후 지금 강단 사학은 식민사학의 큰 틀은 전혀 극복이 안돼 있다.
『환단고기』를 읽어가면서 그 극적 클라이막스가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 선생이 쓴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이다. 단군세기 서문에 대해서도 위서론자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대한민국의 정통 강단사학의 태두들이 자리 잡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너무 근대사의 술어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계만방이라는 말이 옛날에 쓰던 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국유형(國猶形) 사유혼(史猶魂)”하니,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 이게 박은식 선생의 한국 통사(韓國痛史)에 있는 얘기를 끌어다 썼다고 한다.
그런데 박은식 선생의 책 원본, 한자로 된 책을 보면 내가 옛사람의 글을 인용해서 이런 얘기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박은식 선생이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베낀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한 구절을 빼고서 거꾸로 뒤집어가지고서 한국통사에 있는 그런 한 구절을 단군세기에다 끌어다 썼다고, 이유립이가 조작을 했다고, 그런 것을 보면 위서론자들의 심성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행촌 이암이 국록을 먹은 사람이 몽고니, 고려니 이런 말을 직설적으로 쓸 수가 있느냐’라고 묻는다. 행촌 이암은 고려말 사람으로 여섯 명의 왕을 모신 사람이다. 지구촌의 3분의 1을 통일한 원나라 대제국이 고려를 쳐들어 왔을 때, 원나라의 시녀로 전락한 고려의 오잠吳潛, 유청신柳淸臣 같은 역적이 나와 가지고 고려란 나라 간판을 떼고서 전부 보따리 싸들고 원나라 조정으로 귀속해버리는 이런 역적들이 날뛸 때다.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 행촌 이암이 어린 시절 자기 아버지의 명으로 열 살 때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 위에서 하늘에 맹세를 했다.
그 시詩에 제가 동방의 빛을 꼭 회복하겠나이다. 그런 젊은 날의 순정이 단군세기 서문에 보면 너무도 명쾌한 논리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정리 돼 있다.
그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태도부터가 잘못되었다.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꼬투리를 잡다보니 ‘잠청배(潛淸輩)’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잠청배(潛淸輩)"는 원래 이암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인데 원나라 간섭기 때 고려 인물로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 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위서론자들은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하여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 지식의 부족을 스스로 드러낸 주장이다. 정말 통탄할 노릇이다.”
그들은『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과 인명의 실제 사용연대가 저술 연대보다 훨씬 후대이므로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고탑이라는 지명과 잠청배라는 용어를 들어 단군세기나 북부여기가 청나라 이후에나 저술될 수밖에 없는 책이므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청나라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억지스러운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고탑은 그들의 주장처럼 청나라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명대明代의 기록에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그들은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를 문제 삼는 것이다.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라는 『세조실록』의 기록은 보지 않고 그보다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한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몇 가지만 지적하더라도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양심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동경대에서 나와 있는 1904년도 삼국유사본을 보면 거기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아주 뚜렷하게 나와 있다. 이마니시 류가 그걸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조작을 했는데, 우리나라에 여러 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 야, 그것은 國 자나, 因 자나 그때 같이 그런 서체로 썼다고 한다. 조작한 게 아니라고 한다. 그걸 가만히 보면 심성이 잘못돼 있다.
위서론자들은 또 자유, 평등, 인류, 세계, 원시국가, 문화,문명, 개화, 부권(父權), 헌법과 같은 어휘가 쓰인 것을 빌미로, 환단고기를 일제강점기 때 독립 운동가들이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해 꾸며낸 책이라 한다. 그런데 이 어휘들은 고문헌에서도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 자유는 ‘자기가 주인이 되다’라는 뜻으로, 평등은 산스크리트어의 번역어로서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자유와 평등도 그러한 뜻으로 쓰인 것이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나온 시선집인 옥대신영(玉臺新詠)에 수록된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서 “내가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분함을 품고 있었는데, 네가 어찌 멋대로 할 수 있는가(吾意久懷忿 汝豈得自由)라고 하여 ‘자유’라는 어휘가 나온다.
인도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에 의해 한문으로 번역된 금강경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편에 이 법은 차별이 없어 높고 낮음이 없다(是法平等 無有高下 )라고 하여 ‘평등’이란 어휘가 사용되었다.
장자 지북유(知北遊)편에서 “생물은 이를 서러워하고, 사람은 이를 슬퍼한다(生物哀之 人類悲之)라 하여 ‘인류(人類)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당나라 때 한문으로 번역 된 능엄경의 ‘무엇을 중생세계라고 합니까(何名爲衆生世界)라는 구절에 ’세계‘라는 어휘가 사용 되었다.
주역 계사하(繫辭下)의 ‘군자는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존립해 있을 때에도 멸망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려질 때에도 어지러움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보전할 수 있고, 집안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君子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是以身安而國家可保也)라는 구절에서 고대로부터 사용된 ’국가‘를 확인 할 수 있다.
‘문’과 ‘화’가 결합된 문화라는 말은 고대에 이미 사용 되었으며, 문으로써 가르쳐 변화시키다(以文敎化)를 뜻한다.
전국시대의 역사서인 국어(國語), 진어(晉語)편을 보면,“선행을 상주고 간악한 행위를 벌주는 것은 나라의 법이다(賞善罰姦 國之憲法也)하고 하여 ‘법’, ‘법전’을 뜻하는 ‘헌법’이 나온다.
백번 양보하여 정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들을 돌이켜 보라.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지 않았는가. 주역(周易)은 태호 복희씨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고, 도덕경은 왕필이 덕경과 도경의 본래 순서를 뒤집어 재구성한 것이다.
동양의학의 성서인 황제내경은 황제 헌원을 가탁하여 전국시대를 거쳐 한 대에 성립되었고, 불교의 화엄경도 분리되어 있던 경전들이 수차례의 결집을 거쳐 후대에 합쳐진 것이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다섯 권의 사서가 천 년에 걸쳐 쓰인 사실과 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태백일사가 나온 지 400년이 지나 환단고기가 묶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원래 다섯 저자들이 쓴 원본이 무수한 전란과 외세의 사서 강탈을 무사히 피하여 전해졌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계연수가 모은 다섯 권은 필사 과정에서 인물, 연대, 장소가 오착되기도 하고 부족한 내용에 가필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들과 다소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가 전적으로 매도 될 수 는 없다.
그리고『환단고기』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그 내용이 유물로 입증된 사례도 있다.『환단고기』에는 장수왕의 연호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이 1915년에 발견된 불상에 새겨진 기록에 의해서 입증된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건흥 연호가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난 것이다.
역사기록의 진실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를 과학적 용어로 검증이라고 한다. 시기적으로 볼 때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밝혀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된다.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 비문(碑文)"도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천남생(泉男生)은 고구려의 재상이자 영웅인 연개소문의 큰 아들이다.
그의 묘비명이 1923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남생의 아버지 개금(蓋金), 할아버지 태조, 증조부 "자유(子遊)"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태백일사太白逸史』가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밝힌 기록과 일치한다. 이 책은 여기에 남생의 고조부, 즉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을 "광(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 17세손’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왕의 13세손’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환단고기』를 보면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된다.
『환단고기』에는 고구려 제왕의 계보가 제1세 해모수(BCE 194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추모(고주몽, 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주몽의 선조는 해모수이며 그로부터 치면 광개토대왕은 17세가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도 광개토대왕비도 모두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환단고기』가 해명해준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환단고기』가 후대의 창작이 아닌 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알려주는 여러 증거들이 『환단고기』 자체 내에 많이 들어있다.
문제는 그 증거들을 일일이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를 대하는 자세이다. 왜 자세히 연구하고 검토하지 않고 굳이 위서라고 낙인찍는가 하는 것이다. 민족사학자이건, 역사학계의 주류 사학자이건 누구라도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사람은 우선 『환단고기』에 담긴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열린 태도와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환단고기』가 편찬, 간행된 것은『환단고기』의 앞에 붙어 있는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에 따르면 계연수 선생은 자신의 동지이자 벗인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지원으로 30부를 간행했다고 한다. 범례에 ‘기궐’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목판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를 우리에게 전해준 이유립 선생은 1907년생으로서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의 제자이자 계연수 선생의 제자였다. 그는 13세 때 삭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배달의숙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계연수를 위시하여 최시흥, 오동진 등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유립 선생은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는데 특히 교육운동에 뜻이 있어 33세 때에는 신풍학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1948년 남한으로 월남할때『환단고기』를 가져왔다.
이유립 선생은 19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해서 후학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 때 사용했던 교재가 『환단고기』였다. 이는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양종현梁宗鉉 씨가 직접 증언해준 사실이다.
양종현씨는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유립 선생에게 사사했던 분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은 1976년경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유립은 월간 『자유』지를 운영하고 있던 박창암 장군(1923-2003)의 도움을 받아 의정부에 살고 있었는데 백내장 수술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걸로 착각하고 집세 대신에 이유립 선생의 책들을 모조리 팔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환단고기』 원본이 사라지는 바람에 『환단고기』 위서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범례에서도 나오듯이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하였는데,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혼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계연수선생을 체포하고 계연수선생과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고 한다. “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환단고기』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사지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동포들이 수습하던 장면을 직접 목격한 분이 그의 제자인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이들 고유 사서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만 아니라 상고시대 동북아 문화권의 정치, 경제, 풍속, 언어, 음악, 국제 관계 등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최고봉이라 하겠다.
『환단고기』를 조작했다고 하는 위서론을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를 하는데 첫째는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초간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일본이 환국을 뿌리 뽑아서 우리민족의 환국과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시켜버린 것을 보면『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그들이 분명히 본 것이다.
신해년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역사와 혼이 담긴 『환단고기』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1980년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죽기 직전 책이 나왔다.
1980년도 직전까지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의 군부통치 유신체제 시절로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80년 서울의 봄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그동안 음지에서 숨어있던 민중서적과 금서들이 봇물터지듯 나왔다. 결과적으로 계연수 선생은 적절한 시기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선생의 후손 가운데서 현손인 고려 중종( 中宗) 15년(1520년) 이맥李陌(1455~1528)선생이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자기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내려온 단군세기(檀君世紀)라든지,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았었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태백일사太白逸史』書를 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읽어봐야 이 동북아 역사의, 역사 정의가 바로 잡힐 수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이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아성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환단고기>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를 전해준 분들이 대부분 절식(絶食)으로, 또 일본 제국주의 침략주의자들에게 잡혀서 사지가 잘리고 그렇게 무참하게 죽었다. 이『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병도선생 이후 지금 강단 사학은 식민사학의 큰 틀은 전혀 극복이 안돼 있다.
" 한암당 이유립 선생과의 인연"『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유립 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60년대 전후로 해서 “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분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다.
그 가운데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지금 청주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분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운초 계연수 선생이 우리의 시원역사를 선언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잡혀서 죽도록 맞고 사지가 잘려서 압록강에 버려졌는데, 그 시신이 건져질 때 흐느껴 울던 열다섯 살 소년이 바로 한암당 이유립이다. 이유립 선생이 그 명을 아주 무섭게 가슴속에 새겼을 것이다.